난폭했던 할머니, 꽃을 보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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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입력 2012.04.20 03:00 / 수정 2012.04.20 03:00
방치된 치매 노인 40만 명 - <중> 재활 없는 돌봄 서비스
12일 오후 대구시 달서구 송현동 주택가 상록수노인복지센터 2층. 운동치료실 겸 거실 노래방에서 가수 송대관의 노래 ‘차표 한 장’이 울려퍼지자 65세 치매 할아버지의 어깨가 들썩인다. 신이 난 할아버지는 요양보호사의 손을 놓을 줄 몰랐다. 주변 의자에는 박수를 치는 사람, 그저 먼 산을 바라보는 노인 등 모습이 다양하다.
비슷한 시각, 이 센터 물리치료실에선 손호식(가명·81·달서구 본동) 할아버지가 발 마사지를 받고 있다. 지난해 11월 센터에 나오기 전까지는 방문요양 서비스를 받았다. 하지만 딸을 때리고 욕을 퍼부어대는 등 점점 난폭해지자 딸이 요양원으로 보내려 했다. 그러다 센터와 연이 닿았다. 손 할아버지는 탁구 놀이와 공원산책을 하며 점차 좋아졌다. 이제는 발 마사지기를 다른 사람이 기다리면 양보할 줄도 안다. 그는 “단체생활 할 때는 내가 참아야지”라고 말했다.
치매노인들이 자기 집에 가족과 살되 낮에는 주간보호센터에서 활동하면 대부분 병세가 안정된다. 전문가들이 주간보호센터와 재활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림대 강동성심병원 연병길 치매예방센터장은 “집에만 가만히 계시는 분들은 치매 진행속도가 훨씬 빠르다”며 “치매 노인은 복지관이나 주간보호센터에서 사회생활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체 장기요양보험 적용자 32만4000여 명 중 가정서비스를 받는 19만여 명의 7.8%만 주간보호센터에 다닌다. 대다수(86%)는 집으로 요양보호사를 불러 가사 지원과 신체 수발을 받는 방문요양을 택하고 있다. 욕창관리 등 전문서비스를 하는 방문간호 이용자도 2.3%뿐이다. 요양보험제도가 ‘가사지원제도’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2010년 건보공단 통계에 따르면 1, 2 등급보다 신체 기능이 나은 3등급 노인의 75%(17만 명)가 방문요양 서비스를 받았다. 장기요양보험 적용을 못 받고 방치된 치매노인 40만 명의 상당수도 집에만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서울 동작구 위탁 주간보호센터 전영미(48·여) 원장은 “자식 내외가 맞벌이를 해 낮에 집에 방치됐던 노인이 센터에 온 뒤로는 정서적으로 안정되면서 병세가 심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간보호센터는 전국에 1326곳뿐으로 턱없이 부족하다. 일정 규모 이상의 공간을 확보해야 하고 사회복지사·간호사·물리치료사 등 인력을 갖춰야 해 개인이 센터를 열기 쉽지 않다. 일부 보호자는 노인의 상태가 좋아져 장기요양보험에서 탈락할까봐 주간보호를 꺼리기도 한다. 그래서 방문요양 업체(8800곳)만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전문가들은 초기 치매노인의 경우 일정시간 주간보호센터 이용을 의무화하자고 입을 모은다. 방문요양과 치매노인의 재활을 돕는 주간보호를 적절히 섞자는 얘기다. 방문요양에는 재활훈련 서비스가 들어있지 않다.
보건사회연구원 이윤경 연구위원은 “가족의 수발 부담을 덜어주는 데 그치지 않고 노인의 상태가 악화되는 걸 막으려면 재활이 필요하다”며 “어린애들이 어린이집에 가듯 치매 노인도 주간보호센터에 나가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두뇌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와 지자체가 주간보호센터 설립을 지원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복지부 장호연 요양보험제도과장도 “주간보호의 수가를 높여주는 방법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환자 상태와 가정 환경에 맞게 ‘요양 계획(care plan)’을 짜주는 역할도 필요하다. 현재는 장기요양등급을 받더라도 어떤 서비스를 받아야 할지 어떤 업체가 우수한지를 안내하는 창구가 없다. 경기도 남양주 오모(61)씨는 “시어머니가 요양 3등급을 받았지만 어디에 연락해야 할지 몰라 결국 114에서 소개받았다”고 말했다. 연세대 이태화(간호학과) 교수는 “노인의 욕구와 가정 형편에 맞는 맞춤형 돌봄 계획을 세우도록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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